그날은 눈이 많이 내렸다. 교실까지 찾아온 가족들과 다정하게 사진을 찍는 아이들이 보기 싫어서, 윤은 차라리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얗게, 하얗게 온통 뒤덮여가는 세상이 오늘따라 낯설고, 이상할 만큼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면 다시는 볼 일 없을 풍경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잠잠한 핸드폰을 손에 쥐고 만지작거리던 윤은 곧 미련을 털어내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리 기다려도, 아무도 오지 않을 것이다. 눈은 사람을 괜히 감상적인 기분에 젖게 만들었다. 복도에서 가족과 같이 있는 우치를 만났을 때 표정관리가 되지 않았던 것도, 우치가 같이 사진을 찍자고 붙잡았을 때 뿌리치지 못했던 것도, 그리고…마지막까지 전부, 그 빌어먹을 눈 때문이라고. 윤은 생각했다. 어깨에 둘러진 팔에 신경 쓰느..
윤은 지원의 앞에서는 묘하게 얌전해지는 구석이 있었다. 가끔씩 모난 소리를 하긴 했지만, 딱 그 정도가 전부였다. 신경질적이고 예민한데다 결벽 성향까지 있는, 찬바람이 쌩쌩 부는 평소의 조윤에 비하면 그건 귀여운 수준에 불과했다. 정작 당사자들은 그 온도 차이를 인식하고 있지 못했는데, 주변인들은 둘이 같이 있는 모습을 잠깐이라도 보고나면 금세 알아채곤 했다. 지원씨가 입사하고 나서 좀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아요. 윤에게 결재 받은 서류를 품에 안고 종종걸음으로 걷던 직원이 지원에게 말했다. 지원이 그 말뜻을 이해하게 되는 건 조금 나중의 일이었다. 윤은 피곤한 얼굴로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그다지 반갑지 않은 손님이 사무실에 쳐들어온 탓이었다. 노크도 없이 들어와 멋대로 소파에 털썩 앉는 태오를, 윤은 ..
새로운 황자가 궁에 들어왔다는 소식이 도성에서 먼 이곳까지도 들려왔다. ‘태어난’ 게 아니라 ‘들어온’ 것이렷다. 흥미를 느낀 우치가 닫혀있던 장지문을 열었다. 우치의 방 근처에서 조심성 없이 조잘거리던 하인 둘이 허둥지둥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해왔다. 우치는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손을 내저었다. 지금은 인사보다 더 궁금한 것이 있었다. “더 말해 보거라. 새로운 황자가 나타났단 말이냐?”“예, 예에. 듣기로는, 폐하께서 잠행을 나가셨을 때 만난 인연이 있었다고….”“그래, 나이는 몇이나 먹었다더냐?”“열여덟이라 합니다.”“열여덟이라…. 나와 같구나.” 제3황자, 우치는 그리 말하면서 제 턱을 쓸었다. 태어나면서부터가 아니라 열여덟이 되어서야 황자가 되다니, 몹시 드문 일임에는 분명했다. 모르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