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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치조윤

gudokcham 2016. 1. 22. 22:46


그 애는 한 번도 전교 1등을 놓친 적이 없었다. 내 자리는 그 애의 대각선 뒷자리였는데, 나는 가끔, 수업시간에 교과서를 보는 대신 그 애를 봤다. 아무리 재미없기로 소문난 수학선생님의 수업이라도, 그 애는 늘 진지한 얼굴로 듣곤 했다. 나는 바른 자세로 앉아 경청하고 있는 그 애를 보는 게 수업을 듣는 것보다 더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그 애는 운동도 잘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검도부의 에이스라고도 했다. 이른 아침부터 운동장에서 지루한 조회를 할 때, 전국대회 우승자라면서 교장에게 직접 상을 받은 적도 있었다. 그 애는 상을 받는 그 순간까지도 그 애다웠다. 상을 받는 일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얼굴 같기도 했고, 상 따위에 별로 관심 없다는 얼굴 같기도 했고. 여하튼, 그다지 기뻐 보이는 얼굴이 아니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게 아니면, 순수하게 기뻐하는 법을 배운 적 없거나.

 

반 아이들은, 아니 사실은 선생님들까지 다들 그 애를 대하는 걸 어려워했다. 나랑 어울리는 친구들 중 몇은 그 애를 대놓고 싫어하기도 했다. 너무 잘나서 재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 애는 공부도 잘했고, 운동도 잘했는데, 얼굴도 잘난 편이었다. 사실은 겨우 잘났다는 표현 정도로는 부족했다. 분명 남자인데도 예쁘장하다는 말이 위화감 없이 어울릴 것 같았다. 그 인형처럼 예쁜 얼굴에 서늘한 분위기까지 합쳐져서, 또래 여자애들 사이에서는 왠지 모르게 선망의 대상이라도 되는 모양이었다. 교내에서 예쁘기로 소문난, 모 유명 엔터테인먼트에 길거리 캐스팅도 되었다는 여자애가 그 애에게 대쉬했다는 건 꽤 유명한 일화였다. 그 자존심 높은 여자애가 처참하게 까였기 때문에 더 유명해져서, 전교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 일 이후로 그 애에게 감히 고백하려는 여자애는 없었지만, 그래도 그 애는 여전히 소문의 중심에 서있었다.

 

그 애에게 괜한 악감정을 품은 남자애들은 그 애가 게이거나, 아니면 고자일 거라고 씹어댔다. 나는 그 애가 게이든 고자든 별로 관심도 없었고, 그 애는 나와 전혀 다른 세상에 사는 부류라고 생각했다. 그저 어쩌다 같은 반이 되었을 뿐인 사이인 채 졸업할 테고, 졸업 이후에는 아예 얼굴을 볼 일도 없을 거라고. 분명 그렇게 생각했는데.

 

 

 

"...못 본 척 해줄까?"

 

 

 

나는 그 잘난 얼굴이 엉망으로 쥐어터진 걸 보고, 그렇게 물었다. 그 애는 얼굴을 찡그렸다.

 

 

 

"이미 봤잖아. 못 본 척은 무슨."

 

 

 

나는 그 애가 그렇게 짜증내는 모습을 처음 봤다. 그 애는 교복 대신 검도복을 입고 있었다. 나는 오후수업을 듣는 대신 양호실에서 땡땡이를 쳤고, 양호선생님이 나를 깨우지 않고 퇴근하는 바람에 늦은 하교를 하는 중이었다. 얼빵한 면이 있는 양호선생님이 내 존재를 잊고 문까지 잠가버린 탓에, 나는 본의 아니게 창문으로 탈출해야했다. 양호실이 1층에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몰랐다. 양호실에서 무사히 빠져나온 나는 교실에 두고 온 책가방을 가지러 갈지 말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체육관 문이 열리고 2학년, 3학년처럼 보이는 선배들이 쏟아져 나오는 게 보였다. 그때까지도 운동부는 참 늦게까지도 부 활동을 하는구나, 하는 태평한 생각만 하고 있었던 나는, 선배 무리가 우르르 사라진 후에 비틀거리며 걸어 나오는 그 애를 보았다. 그 애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눈에 띄게 얼굴을 구겼다.

 

 

 

"그럼, 부축이라도 해 줘?"

"꺼져."

 

 

 

나는 그 명백한 거절에도, 교실에 덩그러니 남겨져있을 내 빈 책가방을 찾으러 가는 대신 그 애의 가방을 잡아챘다. 그 애는 황당하다는 듯이 나를 노려보았지만, 내게서 도로 가방을 빼앗아갈 힘도 없었는지 잠자코 내 옆에서 걸었다. 나는 그 애의 속도에 맞춰주기 위해서 천천히 걸었고, 그 애는 그것에 몹시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었다. 그 애는 입술을 꾹 깨물고는 비틀거리면서도 최대한 보폭을 넓혔다. 참 형편없는 걸음걸이였다. 다리를 접질린 것 같았는데, 그렇다고 내가 그 애를 업어줄 만큼 우리 사이가 돈독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나는 별 말 없이 그 애의 묵직한 가방을 들고 걷기만 했다. 다친 사람이 들기에는 꽤나 무거운 가방이어서, 업어주지는 못하더라도 집까지는 들어줄 생각이었던 나는 그 애에게 집이 어디냐고 물을 셈이었다. 그러나 내가 먼저 입을 떼기도 전에, 교문 앞에 서있는 하얀색 세단이 눈에 들어왔다. 운전석 문이 열리고, 정장을 입은 남자가 그 애에게 허리 숙여 인사하는 것을 본 나는 그 애를 둘러싼 수많은 소문 중, 그 애가 어느 재벌 집 아들이더라는 소문이, 소문이 아니라 사실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 애는 내게서 가방을 빼앗듯이 들고 조수석에 올랐다.

 

 

 

"쓸데없는 짓 하긴."

 

 

 

그 애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그런 것이었다. 조수석 문이 닫히자마자 차가 출발했고, 나는 그 싸가지 없는 말에 대꾸조차 해주지 못했다. 나는 나중에 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게 나름대로의 감사의 표현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애는 그 뒤로 학교에 며칠 동안 안 나왔다. 기말고사가 얼마 남지 않은 때였다. 그 애 성격에 이런 중요한 시기에 학교를 빠질 리가 없었는데도 그랬던 걸 보면, 아마 생각보다 상처가 꽤 심했던 모양이라고 나는 짐작했다. 그때 그 애를 때린 건 검도부 선배들이었을까. 그 애를 데리러 온 운전기사는 왜 그 애의 상처에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을까. 나는 교과서 대신에 볼 것이 없어졌는데도, 그 애에 대해 계속 생각했다. 1분이 1시간같이 느껴지던 수학시간이 그렇게 빨리 지나간 건 처음이었다.

 

그 애가 학교에 다시 나온 건 기말고사 둘째 날부터였다. 그나마도 상태가 별로 좋아보이진 않았는데, 아마 어떻게든 시험을 보기 위해 고집을 부린 것 같았다. 그 애는 목발을 짚으면서 교실에 들어왔고, 그 애의 무거운 가방은 그 애 대신 그때의 운전기사가 교실까지 들고 왔다. 나만 알고 있던 소문의 진상을, 반 아이들 전체가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아마 하루 사이에 전교생에게 퍼질 터였다. 시험 준비를 하면서도 아이들은 새로운 소문거리에 웅성거렸다. 그 애는 어수선한 분위기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교과서와 필기노트 따위를 꺼내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 애의 얼굴에는 그날은 없었던 상처가 하나 늘어있었다.

 

기말고사가 끝나고, 한 과목씩 성적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 애는 처음으로 전교 1등의 자리를 지키지 못했다. 시험 직전에 학교를 내리 빠졌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6등이나 한 게 대단한 거였지만, 그 애는 그 일이 상당히 분한 것 같았다. 나는 점심시간이 끝나갈 때쯤 담배를 피우러 갔던 안 쓰는 화장실에서 울고 있는 그 애를 봤고, 이번에는 정말 못 본 척을 했다.

 

 

금세 방학식이 다가왔다. 꽉 막힌 교장은 추운 날씨인데도 굳이 운동장에서 조회를 고집했고, 반 아이들은 추위에 떨면서 교장에게 실컷 욕을 퍼부었다. 몇 가지 지루한 순서가 지나고, 올 한 해 동안 학교를 빛내준 동아리들에게 교내 상을 따로 수여하는 차례가 왔다. 그중에는 당연히 검도부도 껴있었는데, 늘어서있는 검도부원 중 그 애의 얼굴은 없었다. 그 사이에서 익숙하게 그 애를 찾던 나는, 그 애가 보이지 않아서 놀랐고, 당연한 수순이라는 듯 내가 그 애를 찾고 있다는 것에 또 놀랐다. 방학식의 형식적인 절차가 다 끝날 때까지, 나는 조금 황망한 채였다. 교실로 돌아와 담임 선생님에게 뻔한 주의를 들은 후, 반 아이들은 부산스럽게 굴며 하나 둘 교실을 빠져나갔다. 그 애는 아직 목발을 짚고 있어서 남들보다 그 속도가 느렸고, 나는 그 애를 기다렸다. 우리는 곧 교실에 단 둘이서만 남게 되었다.

 

 

 

"뭐 할 말 있어?"

 

 

 

그 애는 또 짜증을 냈지만, 나는 그다지 기분이 상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 애는 원래 사람을 대하는 법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왜 아까,"

"검도부는 그만뒀어."

 

 

 

내가 무슨 말을 할 지 알았다는 듯, 먼저 선수 쳐서 대답한 그 애가 내 쪽은 보지도 않고 가방을 마저 쌌다. 나는 그 애를 빤히 보면서 다른 걸 물었다.

 

 

 

"그때 맞아서 그래?"

 

 

 

가방 지퍼를 닫던 그 애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나는 지금껏 '못본 척' 해주었던 것을 다시 끄집어내려 하고 있었다. 그게 자존심을 건드렸는지, 그 애가 나를 힘주어 노려보았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사람 좋게 웃어보였다.

 

 

 

"그런 거, 아냐. 원래 별로 재미없었어. 그리고..."

"그리고?"

"...네가 알 거 없잖아."

 

 

 

나는 그 애가 검도부를 그만두게 된 이유가, 얼굴에 새로 생겨있던 상처와 연관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애가 정말 검도를 재미 없어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너, 그날 일 때문에 내가 불쌍해 보이기라도 해?"

 

 

 

나는 뜻밖의 말에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 애는 불쌍하다는 말을 발음하면서, 자기가 한 말에 자기가 상처 입은 것 같았다.

 

 

 

"전부터 기분 나쁘게 쳐다보는 건 알았는데. 작작 좀 해. 너희가 나 싫어하는 거 나도 잘 아니까."

 

 

 

내가 선배들한테 맞았다는 것도, 소문내든지 말든지 나 신경 안 쓰니까. 그 애는 그렇게 덧붙이고는 목발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나는 그 애의 말에 뒷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았다. 내가 그 애를 관찰했다는 걸 들켰다는 사실이 당황스러운지, 아니면 그 애가 내 시선을 기분 나쁘다고 느꼈다는 게 당황스러운지는 나도 구별이 가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둘 다 일지도 몰랐다.

 

 

 

"너희라니, 너희가 누군데?"

"너랑 같이 몰려다니는 애들. 맨날 뒤에서 내 욕하잖아. 내가 모를 줄 알았어?"

 

 

 

나는 나와 어울려 다니는 친구들 중에 그 애를 싫어하던 애들을 몇몇 떠올렸다. 적어도 친구들이 그 애를 두고 게이니, 고자니 하는 소리를 늘어놓으며 낄낄거릴 때, 동참한 적은 없었다. 나는 조금 억울해졌다.

 

 

 

"나, 너 안 싫어하는데."

 

 

 

나는 내가 들어도 얼빠진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그 애는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다.

 

 

 

"그리고 지금 깨달았는데."

 

 

 

나는 천천히 그 애에게 다가갔다. 그 애는 불편한 한쪽 발 때문에 물러나지도 못했다. 나는 계속 신경 쓰였던, 그 애의 눈가에 새로 생겨있는 멍을 어루만졌다. 눈썹을 치켜세운 그 애가 매서운 손길로 내 손을 쳐냈다.

 

 

 

"오히려 좋아할지도 몰라."

 

 

 

그 애의 얼굴이 이상하게 일그러졌다. 나는 그게 왠지 유쾌해서, 씩 웃었다.

 

 

그 애의 이름은 조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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